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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눈 Yim manhyeok’s Perspe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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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원미술관 기획 임만혁 개인전

 

화가의 눈 Yim manhyeok’s Perspective

 

9.4 ~ 12. 29(2020년 2월16일까지 연장 전시)  미술관 본관 2F

 

임만혁의 개인전으로 20여 년간 진행한 작품을 시기별로 만나볼 수 있다. 2000년대 초반 고독한 자아상을 표현했던 작품에서부터 2010년대 진행된 가족이야기 연작과 최근작에서 작가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인 강릉의 문화와 환경을 그린 작품들이다.

임만혁은 인물을 주요 소재로 다룬다. 단순화된 형태와 다채로운 색감을 통해 시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한다. 평범한 소재를 그림으로 다루면서 아름답고 재치 있는 회화의 특징을 살려낸다. 그러나 작품에 등장한 인물은 커다랗게 강조된 눈과 가늘고 직선적인 팔다리로 인해 불안과 고립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예술가의 눈으로 해석된 세상으로써 회화 작품을 소개한다. 화가 임만혁이 느끼는 삶과 인생에 대해 작품을 통해 공감하고 사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임만혁은 자기 자신을 화가라고 소개했다. 당연한 듯 느껴지는 그의 자기소개가 글을 시작하는 첫 문장에 언급할 만큼 특별한 내용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예술작품을 만드는 사람에 대해 화가라는 말보다는 예술가’, ‘아티스트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스스로를 아티스트라고 부르는 것이 계면쩍다면 저는 그림을 그립니다라기 보다 저는 작업 합니다라고 얘기한다. 이런 흐름을 고려한다면 임만혁이 자기소개에 사용한 화가라는 단어는 예술가라는 명칭에 비해 다소 소박하고 고전적으로 느껴진다. 2019년 현재 예술가라는 단어가 가진 상당한 아우라를 감안한다면 왜 자신을 상대적으로 제한된 정체성의 명칭으로 표현하는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임만혁 화가(그의 바람에 따라)의 작품의 특성과 살아가는 방식을 관찰함으로써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임만혁은 1968년 강릉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는 일에 대한 확신을 품게 되었고, 서양화와 동양화를 학부와 대학원에서 차례로 전공하였다. 회화에 대한 기본적인 기량을 키우고 나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 꾸준히 작품 제작의 길로 접어들었다.

작품은 그의 나이 30대 전후에서 시작하게 된 스타일을 큰 변화 없이 이어가고 있다. 배경을 단순한 기하학적인 선으로 나눈 후 그 위에 인물을 배치하고 색감과 구성에 변화를 준다. 마치 어린아이가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자유롭게 도화지에 그려내는 것 같은 방식이다. 원근과 사실성은 가볍게 무시된다. 재료는 한지에 목탄과 전통 안료를 사용한다. 대학원 재학 시절과 이후 몇 년 동안 서울에서 작업을 했었던 것을 제외하면 임만혁 화가는 고향인 강릉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계획이라고 한다.

 

그렇게 20여 년간 지속한 작품을 살펴보면 초기에 화가 자신으로 보이는 인물과 텅 빈 배경으로부터 시간이 흐르면서 화가의 삶에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는 가족들이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화가 자신이나 가족이외의 인물로 보이는 사람들은 마치 연극에서의 행인1, 행인2처럼 느껴지는데 그들은 초기작에서부터 간헐적으로 나타난다. 그림속의 사람들은 모두 날카로운 선으로 윤곽선이 표현되었다. 커다란 눈과 격하게 꺾여 있는 얇은 팔다리를 가진 인물들은 보이지 않는 줄로 조종되는 서커스 인형 마리오네트Marionette 같기도 하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어떤 일이 외적으로 단순하게 보인다고 해서 그 일이 쉬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작업 과정은 수없이 반복되어 익숙해졌을 뿐 매번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것이다. 또한 새로운 것을 도입하지 않음이 반드시 경직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쩌면 20여 년 전에 자신의 스타일을 찾은 임만혁 화가는 그 방식을 깊이 있게 전개시켜 나감으로써 외적인 변화에서 얻을 수 있는 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양성의 측면을 포기한 대신, 깊이와 본질을 꿰뚫는 회화작품을 얻고자 하는 것일 수고 있다. 임만혁은 자화상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 작업도 시간에 따른 자신의 변화상을 담으려는 것으로 해석되지는 않는다. 사람의 얼굴, 단순화 된 신체를 통해 그가 관찰하고, 얻어내려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형식에 있다고 할 수 없다. 형식은 이미 반복되고 있으니까.

 

이처럼 작품에 있어서나 삶의 방식에 있어서 임만혁의 가장 큰 특징은 단순함이다. 그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는 한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화가라는 명칭의 소박함만큼이나 그의 생활방식은 단촐 하다. 본인이 태어나 살아온 동네를 평생 떠날 생각이 없는 것도 그렇고, 그가 바라는 것은 단지 그림 그리는 일로 생계유지가 가능한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소망도 그러하다. 그는 두 차례의 인도 여행을 통해 자신의 회화기법과 재료가 매우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로부터 고무되기도 하였다.

현대의 예술가는 이유 불문하고 독창적이고 혁신적이기를 요구받기에 재료나 형식에 있어서 남들과 다른 것, 이전과는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몇 가지 특성을 살펴보았을 때 임만혁 화가의 태도는 최근의 흐름과 반대 방향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세대를 이어 내려오는 동일한 흙과 기법으로 비슷한 형태의 도자기를 평생 만드는 도공이 떠오른다. 임만혁 화가는 이처럼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방식으로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가치를 지니는가?

 

작품 속의 등장인물은 다소 불안한 느낌을 자아낸다. 특히 작품마다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 있다. 약간의 놀라움과 두려움을 동반한 커다란 동공이다. 최근작으로 넘어올수록 작품의 색감은 밝고 경쾌해졌고 인물의 날카로움도 둥글둥글하게 다듬어진 경향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눈빛과 알 수 없는 표정은 일관성 있게 이어진다. 전작들에 비해 조금 더 사실적으로 표현되고 있어서인지 팔다리가 조금 어색해 보이는 느낌은 오히려 더 두드러지기까지 하다.

 

우리에게 불안은 일상이 되어있다. 마치 존재에 낙인이 찍힌 채 태어나기라도 한 듯이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가 인간 실상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인 위치, 건강과 개인적 성취 등을 총해 잠시 공허를 잊게 해줄 수 있으나 말 그대로 잠시이다. 우리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인간관계에서는 어떠한가? 정서적 신체적 경제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지만 사람들과의 거리는 조금 더 가깝거나 멀 뿐 누구도 타인과 온전히 만날 수 없다. 사실 진짜 비극은 우이레게 존재하는 공허와 분리감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오는지도 모른다. 임만혁이 그려내는 세계는 좁은 세계일 수 있으나 실상을 직시하는 세계이다. 자기 자신, 가족, 타인, 주변 환경, 최근에는 지역사회의 문화에까지 작품의 소재를 조금씩 넓혀가고 있는 듯 보이지만, 나는 그가 그려낸 세계의 양적인 측면보다 얼마나 진실하게 인간의 실상을 투명하게 비추는가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자기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화면 속 화가의 모습, 화가는 그러한 인간 존재를 목격하고 나서 우리 눈앞에 마치 대질 신문이라도 하듯 제시한다.

 

임만혁 화가를 방문하여 대화하던 중 소수의 예술작품에서 가끔 느낄 수 있는 신선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주제로 그다지 많은 말을 나눌 수는 없었다. 살아있는 것, 생명, 힘이 있는 작품 등등의 유사 표현을 덧붙이긴 했지만, 그와 나는 언어로는 명확하게 예술작품에서의 신선함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와 내가 서로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도 정확히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고 확신할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최근 현대문화가 추구하고 있는 새로움과는 다른 차원인 신선함은 결코 외적인 것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재료와 기법 등 물리적인 실체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물리적인 실체를 통해 전달된다 할지라도 작품에서 사람에게 전달되는 진짜 내용은 눈에 보이는 것 보다 더 근본적인 데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신섬함이라는 말로도, ‘진실이라는 말로도 전달할 수 없는 것. 애초에 언어로 전달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예술로 표현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수 십 년을 비슷한 작업을 반복하는 화가는 육안의 눈만으로는 볼 수 없는 그것을 쫓고 있는 자일 수도 있다. 임만혁의 눈. 화가의 눈으로 보고 표현하려는 것의 가치는 보이는 것 너머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이상원미술관 학예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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