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아름다움과 시 2020. 7. 14 ~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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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아름다움과 시
2020. 07. 14 - 2020.11.15
전시 <현실과 아름다움과 시>는 세 명의 그룹전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회화영상(정석희), 입체설치(천성명), 연필회화(구명선) 작품들은 각기 짙은 개성을 지녔다. 이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아 전시를 하게 된 의도는
이들 작품이 찰나와도 같은 삶의 한 장면을 섬세하고 독창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소설 또는 시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는 점 때문이었다.
‘현실과 아름다움과 시’라는 말은 르네 위그(미술사가, 1906~1997)가 예술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용한 문구이다.
현실은 예술의 대상이며 아름다움은 예술에 있어서 조형적 측면, 시는 예술가의 영혼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예술의 핵심적 요소를
가리키는 단어로 썼다.
사실 시나 소설, 회화, 조각 등 모든 예술에 대해 인간은 작품으로부터 얻은 감흥을 자연스럽게 자신과 연결된 어떤 이야기로 지각하게 된다.
‘이야기가 없으면 존재가 없다’라고까지 말 할 정도로 인간에게 서사는 뗄 수 없는 요소이다.
그런데 ‘History’라는 말이 거대 서사를 가리키듯 우리는 눈에 두드러지고 큰 소리와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일상을 채우는
다양하고 미세한 감성과 느낌은 쉽게 흘려버린다. 어쩌면 삶이 기계적이 되고 아무런 감흥이 없어지며 무의미해지기까지 한 이유에는 그런 삶의
태도가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다.
예술가들은 쉽게 놓치는 감정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상념들에 더 많이 예민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느낌을 거르고 벼려서
(때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눈에 보이거나 들리거나 만져지게 표현한다. 그 느낌이 관객에게 전달될 때 관객에게는
그것이 이야기의실마리가 되며, 자신도 경험한 적이 있는 일상의 소중한 측면을 재발견 할 수 있게 된다.
그 순간에 삶에 숨결이 불어넣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가 가장 예술적인 순간이지 않을까. 바로 예술이 삶이 되는 순간.
전시작은 영상, 설치, 회화, 드로잉(33개가 1작품)을 포함하여 총 14점이 전시 된다.
예술작품과 상상력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여기서 말하는 상상력이란 이야기를 만드는 힘이다. 이야기와 미술작품에 대한 상관관계를 따져보고 싶은 호기심 에 문학적인 뉘앙스가 풍부하다고 여겨진 세 작가의 작품을 모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선별한 작품에 대해 되새겨 생각해보니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미술과 문학성에 대해 어설프게 접근했다는 뉘우침이 뒤따라 왔다. 시각예술에서 조형성이 단순치 않듯이 문학예술의 문학성도 명확하게 정의내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도 주제도 다른 이 작품들은 서로에게 훌륭한 파트너가 되어 하나의 전시로 묶일 수 있었다. 애초에 계획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의 요소를 분석하고 미술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문학성에 대한 의미 있는 해석을 하는 일은 나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이야기’에 대해서라면, 문학계 종사자의 말이지만 ‘이야기가 없다면 삶도 없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깊이 공감되는 의견이다. 이야기는 인간의 삶에서 예술마저 포괄하는 더 큰 단위의 개념이 아닐까 싶다.
정석희 작가의 작품은 많은 수의 회화를 이어 만든 영상인 만큼 시간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한 인물이 집 밖으로 나와 곧 눈이 올 것 같은 하늘을 쳐다보고 이내 집안으로 들어간다. 천천히 날이 어두워지고 집안에는 불이 켜지고 눈이 내린다. 작품 <눈이 오겠네>이다. <편지를 쓰다>는 거실 겸 서재로 보이는 실내 책상 앞에 앉아있는 인물이 있다. 제목으로 보아 편지를 쓰고 있으리라 짐작 된다. 실내는 점차 어두워졌다가 일순간 해체 되고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눈 오는 날, 편지 쓰는 인물, 작품은 특별할 것 없는 사건을 담담하게 보여주는데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작품의 짧은 순간이 암시하는 것들을 통해 그 나머지를 우리는 다만 상상할 뿐이다. 눈이 온다는 현상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이면서도 작품을 통해 내면의 사건으로 인식된다. 우리에게 지각되기에는 움직이는 회화인 정석희 작가의 작품은 작품 속에서 화가의 시각과 감정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고스란히 드러낸다. 결과물로서 회화이기보다 과정으로서의 회화인 것인데, 글 말미에 언급하겠지만 이 작품을 통해 끊임없는 선택과 놓아버림의 연속인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는 현상을 유추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천성명 작가는 <그림자를 삼키다>라는 제목 아래 만들어진 작품 두 점을 전시하였다. 천성명 작가의 작품은 개인전으로 발표 되었을 때 공간 전체에서 세팅된 작품들의 유기적인 연결 을 통해 전달되는 의미의 폭과 깊이가 상당한데 일부 작품만 전시함으로서 다소 축소되었다는 점이 아쉽다. 작품은 한손에 돌을 움켜쥐고 있는 남자와 또 한손으로 무지개 색상의 실을 늘어뜨린 여자 입상이다. 남자는 작품의 정서 전체를 끌고 가는 주체이다. 그림자를 삼키는 사람. 그림자는 남자의 존재와 뗄 수 없고, 빛과 어둠의 변주에 따라 나타나기도 사라지기도 한다. 남자는 상처 입었고 혼란스러워 한다. 작품의 대부분에 마치 남자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을 지켜보는 듯 한 여자가 등장하는데 그녀는 남자와는 다른 현실에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천성명 작가가 활동 초기부터 발표해 오는 일련의 작품-달빛 아래 서성이다, 그림자를 삼키다, 부조리한 덩어리 등- 전체를 살펴보면 인물 내면의 변화를 섬세하게 서술하는 긴 소설 속 연결되는 다른 장들을 펼쳐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작품들은 입체, 회화, 및, 소리, 언어, 공간 이라는 다양한 요소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언젠가 천성명 작가의 활동 기간 내내 만들어지고 변화 하는 공감각적 요소들로 이루어진 작품들에 대한 종합적 조망을 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구명선 작가의 작품은 종이에 연필로 그린 것이다. 연필 작품은 ‘드로잉, 소묘, 스케치’정도의 명칭으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구명선 작가의 작품을 ‘연필회화’라고 소개하고 싶다. 물론 회화는 물감과 붓의 움직임과 컬러의 매력을 발산하는 그림을 일컫지만, 구명선 작가의 작품을 위의 세 종류 중 하나에 넣기에는 부적절하게 느껴진다. 작품 재료에 대한 이야기를 장화하게 하는 이유는 현실의 미술세계를 의식하면 연필과 종이로만 작업한다는 사실이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에게 ‘가장 작은 무기를 들고 거대한 전쟁에 나서는 병사를 보는’듯한 느낌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작은 무기가 실전에서 전혀 부족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구명선 작가는 게임, 잡지, 만화에 등장하는 소녀캐릭터를 그린다. 이 소녀는 작가가 현실에서 느낀 미묘한 정서를 연기하는 배우와 같다. 소위 ‘독기’라 칭할 수 있는 기운을 지니고 있는데 크게 위협적이지는 않다. 작품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제목과 함께 보는 사람의 심경을 자극한다. 구명선 작가의 작품은 충분히 아릅답지만 왠지 순수미술이라면 갖추어야할 것 같은 ‘불멸의 진실’이나 ‘보편적인 가치’등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의 작품은 겉모양은 대중문화의 스타일을 차용하여 고급문화의 허위를 비판하는 팝아트 계열의 작품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적거에게서는 그러한 목적의식이 발견되지 않을뿐더러 정작 작품을 통해서는 고전적이리만치 충실한 미적 추구와 장인의 작업방식과도 같은 수련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비현실적으로 단순화되고 캐릭터화 된 소녀의 외모 때문에 그림은 더 환상에 가까워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그림 속에서 적나라한 현실을 떠올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소설은 거짓을 통해 진실을 말하는 작업이다’라고 한 일본의 소설가 하루키의 말이 떠오른다. ‘현실과 아름다움과 시’라는 전시 제목은 르네 위그(미술사가, 1905~1997)가 그의 책 <보이는 것과의 대화>(르네 위그, 곽광수 옮김, 열화당, 2017)에서 예술을 설명하면서 언급한 문구이다. 르네 위그는 예술의 소재가 되는 것들, 예컨대 자연이나 사회 현상이나 작가의 경험을 현실이라고 표현했다. 예술이 가지고 있는 조형적 가치를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로 지시하였다. 마지막으로 작품에 담기는 작가의 영혼을 시라는 말로 대체하였다. 예술작품에 있어 핵심이 되는 요소를 특정한 예술 장르를 들어 설명한 것이다. 직접적이지 않으나 그의 설명은 호소력이 있다. 그러나 곧 이어 시, 즉 예술가의 영혼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르네 위그의 시험을 빌자면 정석희, 천성명, 구명선 작가의 작품에서 시적인 탁월성을 발견할 수 있다. 작품은 작가가 경험한 삶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경험에 집중하고 그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하였으며 예술작품이 될 수 있도록 벼리는 과정을 거쳤다. 그 순간들을 이야기로 만든 것이다. 만약 이들의 영혼이 작품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그들의 마음의 힘이 그렇게 한 것이다.
김우창 (1937~, 문학평론가)은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고, 종합하고, 통일성을 부여하는 작업은 마음의 겨냥하는 행위로 인한 것인데 우리는 마음의 움직임으로 인해 만들어진 내용들 속에서 애초의 ‘마음’을 잊기 쉽다고도 했다. 마음은 움직임이고 그 자체로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정석희 작가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마치 움직이는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세계를 보는 듯 한 느낌을 받는다. 그의 작품이 더욱 그러한 것은 일상의 표면과 인물의 내면사이를 한계 없이 자유롭게 겨냥하는 시선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마음은 우리가 세상을 의식하고 의미부여하도록 활동한다. 이야기는 거기에서 탄생한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그 마음자체를 잊고 대상, 혹은 내용에 고착되곤 한다. 그렇게 움직임인 마음이 멈추면 삶도 경직된다.
참다운 예술가의 영혼이란 자연스럽게 흐르는 마음을 잊지 않는 사람, 한 사물 속에서도 여러 다른 현실을 읽는 시인의 시선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술은 예술가가 지어내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늘 변화하고 움직이는 마음이 배후에 있다. 그 사실을 잊지 않을 때 예술은 살아 숨쉬고, 더 이상 우리는 하나의 이야기만을 붙들지 않게 될 것이다. /이상원미술관 학예연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