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hyzometic images 횡단하는 이미지 2021.04.27~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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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근개인전 Rhyzometic images 횡단하는 이미지 _ 2021. 04. 27. ~ 06. 27.
양 oil on canvas, 80.3x100cm, 2006~2021
늑대 oil on canvas, 80.3x100cm, 2006~2021
닭-호랑이 oil on canvas, 130x162cm, 2007~2021
'재현적' 회화로 부터 '리좀적' 회화로
‘나는 그림 그릴 줄 밖에는 모른다’고 고백하는 박영근 작가는 자신을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어 비유하면서 치열하게 캔버스와의 싸움을 진행해 왔다. 다섯 개의 돌멩이와 가느다란 막대기는 화가의 상상과 표현력일 것이며 골리앗은 세상이자, 텅 빈 캔버스였을 것이다,(작품 <다윗의 도구,2008>)
이번 개인전 <횡단하는 이미지 Rhyzometic images>에 대해 나는 그의 일련의 회화적 시도를 리좀(Rhizome/Rhy-zome)개념에 기대어 이해해보고자 하였다. 특히 <천 개의 고원>에 전개된 ‘재현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과 ‘리좀 또는 리좀적 성격’을 대안으로 피력하는 아이디어에 공감하며 주목했다.
리좀(Rhyzome:영어/Rhizome:불어)은 땅 속에서 줄기를 뻗어나가는 잡초의 일종을 가리키는 식물학 용어에서 비롯된 단어이다. 이 단어는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 두 사람의 공동작업인 <천 개의 고원>에서 그들만의 해석이 담긴 철학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땅속줄기 식물의 속성을 수직으로 자라나는 일반적인 나무의 속성과 대비하여 생에 대응하는 자세에 적용시키는 새로운 개념적 도구로 만든 것이다.
재현(再現)의 사전적 의미는 ‘다시 나타내다’이다. 이 단어가 가진 정의의 본질에 입각하여 미술에 있어 재현은 원본(대상 또는 심상)을 다시 나타내는 것으로 그 현상 자체는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 개의 고원, 들뢰즈· 가타리공저> 및 <현대미술, 들뢰즈· 가타리와 마주치다, 사이먼 오설리번 지음>에서 다룬 ‘재현’은 조금 더 주관적으로 의미부여 된 단어라고 여길 수 있다. 여기서의 ‘재현’은 단순하게 설명하면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선과 악, 옳음과 그름, 내용과 형식, 정신과 육체, 창작자와 관람자... 등등으로 현상을 양분하여 나누는 사고방식이다. 질문에는 하나의 정답만이 유효하며, 그에 의해 위계가 성립되며 더 나아가 고정된 정체성을 지니게 되고 가치 판단에 있어 획일적이고 경화된 사고방식이라고 설명한다. 회화는 화가에 의해 무언가가 재현되는 대표적인 표현 방식이다. 우리는 거의 자동적으로 회화작품 앞에서 무엇을 그린 것인지,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것이 그려진 방식에 의해 드러나는 생생한 현실감을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정답’이 있다는 전제하에 인식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태도로 접근하는 회화의 방식을 ‘재현적 회화’라고 의미부여 하였다.
그에 비해 리좀적 의미의 회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일단 예술가, 예술작품, 관람자로 삼분하여 작품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말하는 것과는 달리 쉬운 일은 아니다)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다양하게 뻗어나갈 수 있고, 뻗어나가야만 한다. 작품과 의미의 일대일 결합을 지양하면서 재료와 기법으로 드러난 물리적 사태(작품자체)를 정서적이며 열린 감각으로 마주쳐야 한다. 고전적 의미에서 예술가가 작품을 만드는 일종의 ‘신’이었고 관람자는 그 신이 만든 하나의 완성된 세계를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했다면, 리좀적 의미에서 예술가 및 예술작품은 다른 세상(예술과 무관한 예를 들면 정치, 경제 사회현상), 다른 사람, 다른 생각들을 잇는 통로자체. 연결과 접속의 과정 안에서 마주침을 일으키는 일종의 ‘장’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박영근 작가의 작품은 명백히 하나의 대상을 재현하고 있다. 추상적인 이미지를 거쳐 초기작품에서 ‘시계’, ‘식기’등이 재현되었고 이후 ‘인물’, ‘동물’, ‘건축물’, ‘사물’이 재현된다. 작가의 시그니처 기법이 된 그라인더를 사용하여 이미지를 지우고, 다시 그리는 기법으로 인해 작품은 정지된 하나의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동적인 속도감을 지니게 되었으나 여전히 하나의 대상-그것이 다양한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을지라도-을 재현한 것이었다.작품의 변화는 각각의 작품 안에서 일어났다기보다 소재를 선택하는 방식과 작품을 배치하는 방법을 통해 진행되었다. 인터넷의 사용이 가능해짐에 따라 대상들과 그에 관한 정보를 웹브라우저를 통해 접하게 되면서 소재의 다양화가 가속되었다. 브라우저에서 하나의 대상을 검색하면 그 대상과 관련된 온갖 사건과 단어와 이미지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박영근 작가는 이질적이고 다양하며 때로는 모순되는 이야기들을 자신 안에 흡수한 후 이미지를 캔버스에 옮긴다. 그런 다음에 명확하지 않고, 정리되지 않은, 느슨한 연결의 흔적이 있는, 때로는 상상으로만 연결되는 다른 이미지들을 함께 배치한다. 이미지의 배치(병치)는 2000년대 중반부터 진행되었다. 예를 들면 2007년 작품 <정복의 본능>은 백악관 건물 이미지를 중아에 두고 양쪽으로 호랑이와 사자가 배치되어 있다, 두 동물은 백악관 이미지를 향한 방향이었는데, 이번전시에서는 백악관으로부터 멀어지는 방향으로 배치를 바꾸었다. 작품은 <정복의 허무>라는 다른 제목으로 전시함에 따라 첫 번째 작품배치와 달라지며 그와 동시에 이전 작품과 통합되어 권력의 이중성을 표현하게 되었다.
이질적인 이미지가 담긴 캔버스를 병치하는 방법 이후 이미지에 전혀 다른 이미지를 추가, 변형을 가하는 작업들이 진행되었다. 이미 완성된 작품에 사과, 양귀비꽃 등을 그려넣는다.(작품 <북안산의 사과, 2017~2021>, <닭-호랑이, 2017~2021>) 작품의 완성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되어 마치 리좀과 같이 어디로 어떻게 뻗어나갈지 모르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전에도 식물과 동물을 접속 시켜 그린 작품들이 존재했다. 매화의 가지가 된 뿔을 단 사슴을 그린 <꽃사슴-매화,2007>나 인물과 식물을 연결해 그린 <찰리채플린-매화>작품 등이다.
박영근 작가의 작품 중 이번 전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시작은 <양-늑대-범선-말, 2006~2021>이다. 제목 그대로 대상의 이미지가 그려져 있는 작품들은 각각 40호 작품 12개씩이다. 이 캔버스 작품 48점이 병치되어 한 화면을 이루게 된다. 양은 복제양 돌리가 탄생한 사건을 접하면서 그리게 된 작품인데, 늑대는 복제프로젝트의 마지막 동물이었다는 흥미로운 서사에 의해 선택되었다. 범선은 신대륙 항해를 떠난 개척자들을 상징하는 이미지이고 말 또한 정복자의 이미지를 이면에 감추고 있다. 같은 대상을 그린 이미지 12점은 직접 작가가 모두 제작한 것으로 비슷해 보이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다. ‘유전자 복제 프로젝트’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인 입장이 담긴 것인데, 이것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전사轉寫-지도그리기’의 개념과 연결된다. 이 개념은 사본(모방)에 대비되는 리좀적인 활동으로써 종래의 것(그것이 개념이나 구조나 상황이든)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끊임없이 변형하기를 주문한다. 여기서도 동일화, 획일화는 배척된다. 작품<양-늑대-범선-말, 2006~2021> 은 인간의 지배욕망(아론적이며 수직적 나무구조 사고방식에 입각한)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인 의식이 이미지를 이루는 소재에서 뿐 아니라 형식으로써 ‘전사술의 원리’가 회화적으로 구현된 작품 아닐까.
책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의 속편으로 저작된 <천 개의 고원>은 1980년대에 출간되었다. 난해하면서도 감각적이 내용의 이 글은 글 자체에 대해 다양한 독해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21세기에 들어서서 월드와이드웹(www)이라는 새로운 도구로 말미암아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차원의 연결과 접속이 가을해지는 시점에 이들의 생각은 더욱 공감대를 자아낸다. 한 방향의 뿌리에서 또 다른 한 방향의 가지로 뻗어나가는 일관되고 안정감 있는 이원론적 사고방식을 전혀 다른 사고방식으로 전환하고자 했던 의도는 무엇일까? 그 사고방식이 인간의 역사에서 반복적인 비극을 낳으며 부당한 권력을 생성하고 생에 대한 부감각의 요건이 되었다고 여긴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인ㄴ간은 자신과 대상을 분리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고, 예술작품은 무언가를 대상으로 재현하기 나름이고, 여전히 우리는 작품을 일관된 의미 안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까닭에 들뢰즈도 명확해 보이는 방식의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같은 것을 반복(모방)하지 않기를, 하나의 신념으로부터 끊임없이 이동하기를(탈주), 자 신의 정체성을 단정 짓기 말기를 요청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지속적인 떠남과 변형에의 시도는 인간의 사고가 경직되는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주변의 삶과 개인의 선택이 창조되도록 이끄는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된 것 이다.
들뢰즈도 예술이 지난 창조적 가능성을 의식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예술은 인간의 이분법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사유를 보완할 수 있는 상당히 효과적인 활동이다. 이미 예술의 영역에 있어 ‘승고’는 뿌리에서부터 존재를 뒤흔드는 ‘경험’으로써 인간을 이성과 언어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명확한 실례라고 할 수 있다.
회화는 이미지의 대상보다, 메시지나 서사보다 그 표현-질감, 색감, 선들의 자유로움-을 통해 무언가를 전달받을 수 있는 감성적이고 정서적인 전달매체이다. 완벽하게 정리 될 수 없고, 명료할 수 없는 생이 이원론적으로 머물러 굳어지거나 카오스로 추락되는 위험에 빠져버릴 위기에 처한 현재 우리에게 예술은 다른 사유를 향하고, 삶의 지도를 새롭게 그리게 해볼 수 있는 가장 리좀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거기에는 사유와 태도의 변화를 수행하도록 변형시킬 만큼의 에너지(강도剛度)가 잠재되어 있어야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