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그 어눌하고 다정한 - 2020이상원신작전 2020. 6.30 ~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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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이상원신작전
흙, 그 어눌하고 다정한
1부 2020. 6. 30 ~ 9. 20
2부 2020. 9. 22 ~ 12. 20
2019년에서 2020년에 제작한 이상원 화백의 신작 전시입니다.
흙은 이상원 화백의 작품에서 단순한 재료를 떠나 흙이 상징하고 있는 생태적이며
역사적인 풍부한 함의를 담은 주제입니다.
흙을 소재로한 작품으로 처음 발표된 지난 <귀토>전시에 이어, 2020년 신작전은
흙에 대한 작가의 감성이 더욱 소박하면서도 자유롭게 표현되었습니다.
표면적인 작품의 소재는 오랜 시간 흙 속에 묻혀 있다가 발견된 듯한
도자기, 맷돌 등 오브제를 그린 것입니다.
재료이자 주제인 흙과 물감과 먹으로 표현된 오브제들은 정지된 물체이지만
시간의 깊이와 더불어 무생물임에도 불구하고
흙과 함께 변화하는 자연의 원리를 전달합니다.
또한 익살스러운 형태와 따뜻한 흙의 색감을 머금은 작품은 흙 자체를 닮고 싶은
작가의 지향을 엿볼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이상원의 작품은 극사실적인 표현방법과 더불어 명암 및 밀도에 있어 탁월한 강약의 조절을 통해 가상자로 하여금 일종의 충격과도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최근의 작품들은 어떤 변화의 기로에 들어서는 것처럼 읽혀진다. 작가가 ‘흙’에 관심을 가지고 ‘흙’자체를 작품의 재료로 사용하면서부터이다.
작가 스스로 ‘흙작업’이라고 칭하는 작품들은 대략 2018 년도부터 시작되었다. 이 ‘흙작업’은 팔순을 훌쩍 넘긴 노화가가 시도하는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 문론 현대미술의 흐름에 있어 회화작품에 물감이 아닌 다른 재료를 섞었다는 것은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공고히 구축하였고 40년 넘게 전통적인 재료를 사용해왔던 예술가가 굳이 이러한 모험에 가까운 실험을 무릅쓰는 경우는 드물다. 이상원에게 있어 <흙작업>은 재미삼아 다양한 장르와 재료를 탐색하는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생의 말년에 접어들어 이토록 몰입하게 된 ‘흙’이라는 물질 안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과 상징들, 그것은 무엇일까? 작품을 통해 어떻게 표현되고 있을까?
회화란 그것을 그린 예술가의 고유하고도 독창적인 하나의 세계, 유일무이한 세계를 드러내는 것 이라고 볼 수 있다. 물감과 붓, 화가의 눈과 손이 만들어 낸 그리 크지 않은 평평한 표면을 통해 전달되는 것들은 신비스러울 정도이다. 회화의 신비를 깊이 있게 느낄 수 있는 조건 중 한 가지는 화가의 역량이다. 화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경험과 가치관과 예술적 기량을 한 점의 그림 속에 토해 놓는다. 가끔은, 아니 빈번하게 화가도 자신 스스로 만들어낸 회화로 구현 된 세계에 놀라기도 한다. 마치 의식하지 못했던 세계를 마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회화는 의도되고 연마 된 인간의 계획과 그 반대편의 우연적인 요소,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주어진 환경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기계적인 적용과 법칙으로부터 늘 뛰쳐나가며 바탕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으로 수놓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회화는 매우 인간적인 활동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동시대적인-회화가 진행되었던 순간의 흔적으로 남아있으므로-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의 미술가는 압도적으로 폭발하는 기술의 진보에 직면해있으면서도 회화적인 시도를 놓지 않는다. 자신의 눈과 손을 통해 만들어지나 자신을 초월한 세계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화가는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불확실성과 극도의 긴장감에도 불구하고 그 끝에서 만나게 되는 새로운 우주에 전율하기에 작품을 계속 만들 수밖에 없다. ‘우주’라는 표현은 이상원 화백이 자신의 작품들 중 불타오르는 태양이나 블랙홀처럼 보이는-물론 그것들은 호박이나 짚더미, 이번전시에서는 도자기를 소재로 그린 것이다-형태를 보며 혼잣말처럼 내뱉은 적이 있다.
한 개인을 우주라고 표현할 수 있듯이 인간의 정신적이며 육체적인 활동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회화작품이 그 안에서 합목적성과 함께 감상자에게 전달되는 충분한 에너지를 갖추었을 때 그 또한 하나의 ‘우주’라고 칭할 수 있다. 그 우주는 활기의 우주가 되기도 하고 고통의 우주가 되기도 하며 혼돈의 우주가 되기도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주제에 있어서나 재료에 있어 흙을 핵심적인 내용으로 다루고 있는 이상원의 새로운 회화를 읽을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그의 초기작품에서부터 흙에 대한 관심을 표현했던 것 같다. 작가가 지닌 흙에 대한 감정은 양가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삶의 고통이 드러나는 현장이자 언젠가 인간이 돌아가야 할 본향이라는 인식이 엿보인다. 파란만장한 삶이 온 곳이라고 믿어지는 곳, 끊임없이 온갖 생명이 나왔다가 돌아가는 곳. 그 앞에서는 시간이라는 개념마저 무색해지는 흙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끌림이 있었던 것 같다. 그가 회화로서 표현한 많은 광경은 촉박한 대지와 연결되어 있고, 땅에 붙어 살아가느라 늙고 약해진 사람들이 있었고, 색감의 대부분의 땅의 색이라고 할 수 있는 검붉기도 하고 회색빛이도 한 것들이었다. 이제 그의 그림은 땅 자체, 흙에 이르렀다.
현대철학의 기표와 기의, 다시 말하면 기호와 그 기호를 통해 표현되는 의미와의 관계에 대한방법 중의 하나이다. 기표와 기의는 단순화 시킨다면 예술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쯤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일상적인 차원에 적용해보자. 우리가 사용하는 말-단어나 문장-은 기표가 되고 그 말을 통해 의미하려는 바가 기의가 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말하려고 하는 내용이 표현되는 말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말로 표현이 안 되는 것들이 더 많고, 그러기에 내용이 더 심오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어떠한가? 우리는 누군가의 말 속에 있는 의미에 중요성을 부여하는가? 오히려 우리는 말의 유희, 말의 실수, 말의 표면에 더 매달리고 있지 않은가? 애초에 의도한 의미라는 것 늘 동일하게 유지된다고 할 수 있는가? 이러한 현상을 더 광범위하게 적용하여 일군의 학자들은 처음부터 고정된 의미는 존재하지 않았고 표현되는 다양한 말들 사이의 차이에 의미가 발생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논리는 언어적인성격이 강한 이미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예술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의미보다 형식자체가 중요해졌고, 추상미술에 있어서 이러한 경향이 극단으로 치닫기도 하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작품의 주어진 의미 보다는 관람객이 자유롭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풍토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예술의 형식이 내용에의 종속으로부터 해방되고 예술작품에 대한 창작자의 절대적 권의보다 관람자의 자율적인 해석의 측면이 부각되어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 경계해야 하는 지점은 예술작품에서 진정성이라는 측면-내용과 진실성과 그것이 표현된 형식에 부합하는가-과 의미에 대해 깊은 고려가 배제된 작품이 사회구성원들에게 공유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책임감 있는 물음이 퇴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원의 작품은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에 따라 소대와 형식이 절대적으로 종속되는 성격의 작업이다.(이상원은 본안 안에 내재된 각별한 감성을 작품에 강렬하게 투사하려고 한다) 앞서 언급한 회화의 우연적인 속성에도 불구하고 이상원의 회화는 신중하게 구성되고 의도되었다.
특히 ‘흙작업’에서는 기표와 기의가 절묘하게 통합된 측면이 있다. ‘흙작업’은 형식에 대한 내용의 역할에 절대적안 권한을 부여해 온 회화의 전공에 있으면서도 기표의 역할을 하는 ‘흙’이 단지 내용을 감싼 포장지, 방향을 가리키는 기호의 역할에 머무르기보다 훨씬 더 강력한 존재감으로 다뤄지고 있다. ‘흙’은 표현도구(기호)이자 동시에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기의)이다. 물론 더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흙’은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작가의 생각을 위해 빌려온 형식으로써 재료이며 상징물로써 기표로 작용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논리적 비약을 허락한다면, ‘흙’은 단순한 기호를 넘어 우리에게 그것 자체로 의미를 발현한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흙’은 다양한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하더라도 도저히 그 아우라를 지울 수 없는, 인간의 생태와 문화에 있어 절대적 깊이에 다다르는 내용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이상원은 흙이라는 물질 자체를 작품에 직접적으로 제시 하였다. 흙 자체로서가 아니면 표현될 수 없었던 것은 무엇이었던 걸까. 기표와 기외, 형식과 내용,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면서 진행하는 의미 분석은 존재의 어느 국면에서는 그 힘을 잃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생명과 죽음, 그리고 우리가 믿는 바 진정한 가치를 지닌 예술이 있다.
흙에 대한 자신의 어떤 마음을 표현하고자 결심 한 이상원은 묘사를 뒤로한 채 작품에 흙 자체를 옮겨 놓았다. 물감과 붓으로 그려서 표현하는 것이 의무라고 할 수 있는 화가로서는 무책임한 시도라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쓴 것이다. 그리고 그는 ‘흙의 색감과 질감은 묵과 먹으로 그려냈던 기존의 나의표현방법으로는 따라갈 수가 없다.’라고 고백한다. 그의 고백과 시도는 그것이 비록 무의식적일지언정 실로 화가로서의 존재감을 내려놓는, 실제를 그림으로 옮겨 놓고자 그토록 노력해왔던 꽉 움켜쥔 손에서 힘을 빼서 서서히 손가락을 펼쳐 보이는 모습으로 비춰진다. 흙에 동화된 예술가의 표현은 자연스럽게 어눌하고 바보스러워진다, 굳이 ‘대교약졸 大巧若拙(큰 기교는 서툴러 보인다)’를 떠올릴 필요도 없이 어떤 그림은 웃음을 자아내고, 이제까지 그가 집중했던 삶의 고통스러운 현장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 이상원미술관 학예연구실